중첩된 시간과 빛
도윤희 개인전: The Hidden Beauty
바이엘러 갤러리, 스위스 바젤 _ 2007. 3. 15 - 5. 5
세계 최대의 미술시장인 바젤아트페어의 창립을 주도했던 세계적인 화상 , 에른스트 바이엘러가 설립한 갤러리 바이엘러에서 도윤희의 개인전이 열렸다. 이미 서구 미술계에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만을 초청하기로 유명한 갤러리 바이엘러 50년의 역사에서 처음 시도되는 아시아 작가 초대전은 갤러리 바이엘러와 작가 도윤희, 전시를 성사시키고 진행한 로렌스 제프리스 기획진 등 당사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전시회이며, 동시에 한국 미술계의 알찬 경사이다.

도윤희는 자연과 생명의 현상 배후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에 일관되게 천착해 온 작가다 . “한국의 화단에서는 드물게, 숙련되고 단단한 기량과 극히 세련된 장식성과 색채에 대한 감각, 다양한 물질들의 뛰어난 연출”(미술사가 송미숙)로 익히 알려진 그는 바랜 듯한 느낌의 색조와 세포나 분자와 같이 물질을 이루는 작은 알갱이 등으로 이루어진 도상을 통해 풍경의 표피적 모습과 그로부터 얻어진 심상의 느낌을 중첩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세계는 시간의 선형적 구조를 벗어나 통사적 시간이 중첩된 구조 속에 존재하는 세계이다. 시간이 부여하는 생명의 속성을 벗어난 식물의 특별한 느낌과 같은 그의 그림에서 물질의 표피적 속성은 두뇌의 심상 속에 융합되어 새로운 물질성을 부여 받게 된다.

도윤희의 작업은 동시대 지역적 , 사회적 이슈들에 관한 예술가의 구체적인 개입이라기보다, 내밀한 사적 해석과 중첩된 시간적 개념 등을 기반으로 구축된 사색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성을 부여 받지 않은 여러 복잡한 개념적 사유들을 추상적이면서도 빈틈없이 치밀하고 섬세하게 창조해내는 도윤희의 작업에는 사물에 대한 통찰의 방향을 암시하는 제목을 창작하는 작업도 포함된다. 작품의 제목을 보면서 관객은 작품이 갖고 있는 개념적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받게 되는 것이다.전시를 진행하면서 언어권이 전혀 다른 스위스와 유럽의 대중들에게 도윤희의 작업이 가진 여러 특징들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것은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이었다 . 그러나 기획진은 2006년에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한국작가들의 그룹전 “Simply Beautiful”의 진행과정에서 체득한 경험들을 기반으로 결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전시를 진행하면서 도윤희의 개념적 영역의 효과적인 전달에 대해 많은 논의를 거쳤는데, 종국에는 부가적인 설명을 절제하고 이미지의 미감을 부각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서를 취급하는 서점에서 시작하여 오랜 역사를 가진 갤러리 바이엘러의 건물은 세월의 흔적을 묵묵히 머금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도윤희의 작품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것이어서 작품과 공간 이외의 어떤 것도 군더더기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공간의 여백으로 인한 사색의 유도를 위해 아쉽게도 몇 개의 대작들을 전시장에 배치하지 않았는데, 이 또한 기쁜 마음으로 수용할 정도로 작품과 공간 사이의 유기적인 조화가 돋보였다. 도윤희의 작업이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그려낸 시간성과 추상성의 이미지였다면, 갤러리의 건물은 스위스 특유의 문화적 애호가 돋보이는 바젤의 흔적이 담겨 있는 공간적 구조였다. 이 시간과 공간은 그 내면에 갖고 있는 중첩의 미학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그러한' 조화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수월함은 현지의 관객들로하여금 좋은 반응을 유도해 냈고, 후에 “Poetry In Motion”전을 통해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소개하는 그룹전 개최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차원의 화면 위에서 반복적으로 쏟아내는 물리적, 정신적 반복은 대상의 외형을 투시하고 3차원적 심연( 深淵 )에 진입 하기 위해 도윤희가 택하는 명상의 방법론이다 . 가시적인 표피 너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순수와 단순을 모색하는 도윤희 의 작품은 그가 태어나 자란 토양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들이다 . 도윤희의 이번 전시는 한 예술가의 진지한 사유의 결과가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보여진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이 곳의 정서를 기반으로 한 진지한 사색의 창작물이 지역을 초월하여 깊은 감정 이입을 도출한 것에서도 의의를 둘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