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의 작품과 생애
요세프 헬펜슈타인(Josef Helfenstein), 미하엘 바움가르트너(Michael Baumgartner)
초기 작품 1899-1910
스위스 베른(Bern)에서 대학진학시험을 치른 후인 1898년 10월, 클레는 미술가로 교육을 받기 위해 뮌헨(Munich)으로 향했다. 그 해 4월부터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이 일기장에 기록하는 습관은 1918년까지 계속되었다. 본격적으로 아카데미에 등록하기 전 준비과정으로 클레는 1898년에서 1900년 사이에 사립미술학교인 하인리히 크니르 데생학교(Heinrich Knirr Drawing School)를 다녔다. 뒤이어, 1900년에서 1901년 사이의 6개월간 그는 뮌헨 아카데미에 있던 프란츠 폰 슈툭(Franz von Stuck)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했다. 1901년 10월에서 1902년 6월까지 이어진 6개월간의 이탈리아의 미술공부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후 수년간을 베른의 부모의 집에서 은거해 지냈다. 시골마을 베른의 편안하고 아늑한 환경 속에서 클레는 혼자 조직적으로 그림을 공부하게 된다. 그는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냉정하게 자신이 받아들인 미술기법들을 분석하고 소화하여 자기 작품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클레는 매우 비판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평가했는데 특히 유화작품에 대해서 자신없어 했다.

1903년 에칭 <인벤숀> 연작을 시작하고 나서야 클레는 처음으로 자신이 의미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인벤숀> 연작을 1905년 3월 완성했고, 이 연작을 “작품 1”로 불렀다. 에칭 작업과 병행하여 클레는 인물 드로잉 연습을 시작했는데, 이 드로잉 작품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인물들로 종종 캐리커쳐의 성격을 갖기도 했다. 1902년 로마에서 보고 감명받았던 로댕의 누드 드로잉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된 이 인체 드로잉 작품들에서, 클레는 선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기법을 선보인다.

1905년 여름 그는 검은 유리판에 드로잉을 새겨넣는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특이한 물질표면이 갖는 저항성을 이용하여 시각표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려 하였다. 이러한 실험적 작업은 유리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으로 이어졌고, 1912년까지 여러 다양한 방식의 시도가 있었다.

1907년 11월 30일 아들 펠릭스(Felix)가 태어나자, 클레는 아내가 피아노 교습으로 생활비를 버는 동안 아기를 돌보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실험적 작업을 계속하였다. 1907년 초부터 클레는 점점 자연의 사생에 몰두하게 되는데 이전의 자유롭고 개성이 강한 드로잉 양식(1903-1906)에서 자연을 직접관찰하고 패턴화하는 방식(1907-1910)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첫 15년 동안 클레는 거의 전적으로 드로잉에 주력했고 이러한 방식은 1914년에 이르러서야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1900년경까지 클레는 자신만의 양식을 찾고 있었다. 1908년경 그는 자신의 순수 드로잉 양식을 버리고 검은색 수채물감을 사용하여 음영효과와 색채효과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1910년에 이르러서는 색채의 언어로 바꾸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1910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양식이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해 8월 클레의 첫 개인전이 베른에서 열렸으며, 이후 바젤 미술관과 빈터투어(Winterthur)의 한 화랑에서도 그의 개인전이 있었다. 클레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1910년 그의 드로잉 작품을 처음으로 구입한 알프레드 쿠빈(Alfred Kubin)과 친분을 쌓으면서 클레는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청기사파(Der Blaue Reiter)와의 교류. 튀니지로의 여행 1911-1914
1911년 1월 클레의 드로잉 작품을 찬미했던 알프레드 쿠빈은 클레를 방문하러 뮌헨에 왔다. 그해 2월 클레는 어린시절 그렸던 드로잉을 포함하여 자신이 해왔던 모든 작품을 총망라하는 작품목록집을 작성하기로 마음먹는다. 클레는 어린시절의 경험이 예술적 창조의 가장 이상적인 밑바탕이 된다고 믿었던 작가 중dml 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의 약 40여 점의 어린시절 드로잉 중에 클레는 18점을 목록집에 포함시킴으로써 이 드로잉들을 작품들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손으로 쓴 작품목록집은 자신의 작품을 관리, 분류, 정리하는 유용한 도구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1898년부터 체계적으로 기록해 온 일기 역시 그의 일대기와 예술적 변천과정을 기록으로 보여주는 주요 자료가 되었다. ‘기록으로 정리하는’ 작업과 더불어, 클레는 이제까지 작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평가하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이처럼 극도로 정확하게 작품목록을 만드는 작업은 1911년부터 시작하여 그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1911년 5월 클레는 볼테르(Voltaire)의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란 작품 (1759년 초판되었음)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 드로잉에서 그는 새로운 인물상을 창조해낸다. <캉디드>에서 보이는 ‘산만한 손놀림’으로 분산된 필치는 인물들이 실체가 없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작품 11,12). 화면에서 선은 재현적 기능과 자율적이고 추상적인 기능 사이의 중간 역할을 한다. 순수하게 시각적 방법으로 클레는 볼테르의 소설의 비관적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근대적인 드로잉 개념을 효과적으로 창출해내었다. 클레의 삽화가 곁들여진 볼테르 소설의 번역본은 1920년이 되어서야 뮌헨의 쿠르트 볼프(Kurt Wolff) 출판사에 의해 간행되었다.

1911년에서 1912년 사이에 클레는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1911년에 그는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친분을 쌓게 되고, 1912년에는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한스 아르프(Hans Arp),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과도 알고 지내게 된다. 1912년 4월, 두 번째의 파리방문은 입체주의 미술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주었다.

청기사파 화가들과 친분을 쌓게 되면서 그는 더욱 더 어린이들의 드로잉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클레는 또한 “현대연합(Der Moderne Bund)”이라는 화파로 조직화된 스위스의 아방가르드 운동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 화파에는 한스 아르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11년부터 클레는 정기적으로 그룹전에 참가한다. 1911년에는 뮌헨의 갤러리 탄호이저(Galerie Thannhauser)의 전시, 그리고 1912년에는 잡지 『청기사파(Der Blaue Reiter)』편집자들이 기획한 뮌헨에서의 2번째 전시에 참가했고, 쾰른(Cologne)의 존더분트(Sonderbund) 국제전, 취리히의 데어 모데르네 분트 그룹전, 뮌헨의 골츠 갤러리(Goltz Gallery) 전시에도 출품했다.

존더분트 국제전과 1913년 베를린의 데어 슈투룸 갤러리(Der Sturm Gallery)는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일에서 열렸던 가장 크고 중요한 두 개의 현대미술 전시장이었다. 곧이어 클레는 독일 내의 소수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되었는데, 이 새로운 미술가 그룹의 활동은 점점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클레의 새로운 자의식은 미술과 문화비평가로서의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1911년 11월부터 그는 베른에서부터 자신의 친구인 한스 블로쉬(Hans Bloesch)가 발행하던 스위스 월간지 『디 알펜(Die Alpen)』에 1년 넘게 정기적으로 전시비평을 기고하였다. 뮌헨에서의 전시비평 기사들을 통해 클레는 새로운 ‘표현주의’미술의 중개자이자 지지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1913년에서 1914년 사이, 클레는 수채화를 통해 색채화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결실의 정점을 이루게 되었던 계기가 1914년 봄 2주간의 튀니지 여행이었는데, 클레는 일기에 이 여행경험을 ‘색채 돌파구의 발견’이라 쓰고 있다. 그는 튀니지 여행 이후의 첫 작품인 수채화 8점을 제 1회 뮌헨의 신분리파(Neue Münchener Sezession) 전시에 공개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1일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파울 클레를 비롯한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활동은 어려워졌고, 미술가로서의 그들의 성공의 전망도 매우 어둡게 만들었다.
제 1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시기: 클레의 성공 1914-1920
독일 대다수의 지식인들이나 예술가들과 달리, 클레는 전쟁에 열광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열정적인 작품활동이 전쟁 때문에 중단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일기에서나 프란츠 마르크와의 서신에서 드러나듯이, 클레는 의도적으로 세상에 등을 돌렸고, 이러한 태도가 자신이 애써 무시하려던 전쟁의 잔학함과 부조리 때문임을 분명히 했다. 튀니지 여행 경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1914년과 1915년은 그가 작업을 시작한 이래 작품제작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자신의 작품목록집에 클레는 이 두 해 동안 제작된 475점의 작품을 기록해 놓았다.

클레는 여름철을 가족들과 베른이나 베르너 오버란트(Berner Oberland)에서 보냈다. 1914년 10월 뮌헨으로 돌아오는 여행길에 그는 전쟁을 피해 보덴 호수 근처의 골다흐(Goldach) 지방에서 가브리엘 뮨터(Gabriele Münter)와 은신해 지내던 바실리 칸딘스키를 방문했다. 1915년 클레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와 알고 지내게 되며, 이후에도 여러 해에 걸쳐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1914년-1915년에 이르러 클레는 단순화된 이미지 구조를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그 자신은 이러한 형태를 ‘수정체적인(crystalline)’ 추상이라 칭했다.

프란츠 마르크가 전선에서 사망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916년 3월 11일, 클레는 독일군에 징집되어 뮌헨 근처 란츠후트(Landshut)의 신병훈련소에 배치되었다. 8월에 그는 보병대에서 슐라이스하임(Schleissheim)의 예비공군함대로 전임하였다. 1917년 1월, 전방에 투입되지 않는 게어스트호펜(Gersthofen) 지역의 왕립 바바리안 비행훈련소(Royal Bavarian Aviation School)로 자리를 옮긴 클레는 근무 외의 남는 시간에 특별히 빌린 방에서 정기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첫 성공은 전쟁기 중에 찾아왔다. 1916년 3월 베를린에서 열린 데어 슈투름 갤러리의 전시도 만족할 만한 것이었지만, 다음해인 1917년 있었던 데어 슈투름 전시는 클레 작품의 판매 면에 있어서 당시까지 최고의 성과를 거둔 전시였다. 그러나 더욱 뜻깊은 성과는 언론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여러 기사에서 클레는 대단한 신인으로 주목받았는데, 특히 그를 주목해서 보았던 작가는 테오도르 되블러(Theodor Däubler)였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독일 미술사학자 빌헬름 하우젠슈타인(Wilhelm Hausenstein)은 클레의 단행본을 계획하기에 이르렀고 1921년이 되어서야 결실을 보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클레는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1920년대 초반까지 그는 일기장의 기록들을 다시 쓰고, 편집하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시각미술의 이론적 문제에 대한 클레의 관심은 전쟁 때부터 더욱 깊어져갔다.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에 그는 첫 미술이론에 대한 글을 집필하는데, 이 글은 1920년 카시미르 에드슈미트(Kasimir Edschmid)가 발행한 『창의적 신조(Creative Credo)』라는 책에 포함되었다. 1918년 말 군 복무를 마치고 1919년 2월 제대한 클레는 뮌헨의 슐로시헨 수레즈네스(Schlöβchen Suresnes)에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여기서 처음으로 유화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 클레는 명암을 색채와 결합시키고, 직각적 형태들을 좀 더 부드럽게 만들면서 별·나무·화살표·문자와 같은 상징적 기호를 그림에 삽입하기 시작한다.

1919년 봄, 클레는 뮌헨 소비에트 공화국(Munich Soviet Republic)의 문화정책에 관여하게 된다. 그러나 공화국 체제가 몰락하자, 그는 이후 들어선 군사정권을 피해 스위스에 정착한다. 여기서 그는 한스 아르프와 교류하면서 트리스탄 짜라(Tristan Tzara) 등 취리히 다다 운동에 몸담았던 다른 멤버들과도 친분을 쌓게 된다.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와 빌리 바우마이스터(Willi Baumeister)는 클레를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교 교수로 임명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1919년 10월 1일 클레는 뮌헨의 화상 한스 골츠(Hans Goltz)와 계약을 맺는데, 이 계약의 골자는 골츠가 클레의 전시와 작품판매에 독점권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작품 판매 면에서 볼 때, 1919년은 클레에게 가장 성공적인 한 해였다.

1920년은 이제 40세가 된 클레가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가 당시까지 했던 전시 중 가장 큰 전시인 한스 골츠의 노이에 쿤스트 갤러리(Neue Kunst Gallery)에서 열었는데 클레는 여기에 363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클레의 적극적 협조 하에 한스 폰 베더콥(Hans von Wedderkop)과 레오폴드 잔(Leopold Zahn)은 클레에 관한 첫 단행본 2권을 출간했다. 10월, 발터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는 클레를 바이마르(Weimar)의 바우하우스(Bauhaus) 교수로 임명했다.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에서 1921-1924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 클레는 걸출한 현대작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는 1921년 1월 10일부터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바이마르에 완전히 정착하기 전 클레는 2주마다 바이마르로 가서 2주씩 머무르곤 했다. 그의 강의는 형태와 조형에 관한 오전의 이론강의와, 오후의 실기강의로 구성되어 있었다. 4월 중순 클레는 도서 제본 워크샵을 담당하였고, 1922-23년에는 유리 회화 강좌를 맡았다. 바우하우스에서의 미술교육은 형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목표로 했다. 이곳에서 가르치는 동안 클레는 자신의 경험에 깊이를 더하고자 노력했는데, 특히 자신의 미술에대한 신념을 체계화시키고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주력했다. 1921-1922년, 바우하우스 초기에 클레가 했던 강의인 “회화형태이론에 관한 논고”의 초안을 비롯하여, 그의 강의 원고 대부분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가르치는 일과 병행하여 클레는 작업활동도 계속 열심히 했다.

1919년 클레는 자신의 연필 혹은 잉크 드로잉 작품을 눌러서 자국을 내어 그것을 색채표현으로 변형시키는(유화로 된 드로잉에 수채물감을 덧씌운 형태의) 고유의 데칼코마니아 기법(decalcomania technique)을 고안해내었다. 이 기법에 속하는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가 <줄타는 곡예사>인데, 클레는 이 작품을 석판화로도 제작하였다. 그는 바이마르에서의 첫 해인 1921년에서 1923년 사이 이 새로운 기법의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동시에 클레는 여러 겹의 색채를 연속적으로 겹쳐지게 해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수채화 기법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바우하우스에서 클레는 기본적인 형태의 구조로서 사각형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데, 이는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과 테오 반 뒤스부르그(Theo van Doesburg)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클레에게 재현요소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작업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했으며, 이를 불변의 절대적인 원칙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의 판매량은 증가하였지만, 경제위기 – 특히, 인플레이션-의 결과로 수입은 오히려 크게 줄었다. 1921년에는 빌헬름 하우젠슈타인(Wilhelm Hausenstein)이 저술한 단행본 『케르앙 또는 화가 클레의 이야기와 이 시대의 미술 Kairouan, or a Tale of the Painter Klee and the Art of this Century』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클레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이해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922년 여름, 칸딘스키가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1923년 여름에는 클레의 글 “자연 사생의 방법(Ways of Nature Study)”이 바이마르에서의 제 1회 바우하우스 전시도록에 실렸다.

1924년 1월 26일, 예나(Jena)의 미술협회(Kunstverein)에서의 전시에서 클레는 “현대미술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유명한 강의를 하게 되는데 이 강의는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같은 해 1월부터 2월까지 뉴욕의 소시에테 아노님(Societe Anonyme)에서는 파울 클레의 미국에서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1924년 봄, 독일인으로 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한 에미 샤이어(Emmy (Galka) Scheyer)는 파이닝거(Feininger), 야블렌스키(Jawlensky), 칸딘스키와 클레의 도움을 받아, 이들 작가들의 작품을 미국의 대중에 알리기 위한 “네명의 푸른색 화가들 The Blue Four” 그룹전을 개최했다. 1923년부터 바우하우스는 우파계열로부터 자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924년 12월 26일,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는 문을 닫게 되었다.
데사우에서의 바우하우스 1925-1931
1925년은 클레에게 있어 또다른 주요 결정의 시기이자, 해외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3월 데사우 지역당국은 바우하우스를 인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잠시 망설였지만, 클레는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는 1926년이 되어서야 데사우로 완전히 이사를 가는데, 그 이유는 그 때부터 그와 칸딘스키가 그로피우스가 교수진을 위해 지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데사우에서 클레와 칸딘스키는 무료로 벽화강좌를 열기도 하였다.

1925년 가을, 당시까지 클레의 작품에 독점권을 행사하던 골츠와 클레의 계약은 쌍방의 합의에 의해 해지되었다. 1919년 이전의 뮌헨 시기 때와 같이 클레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전시와 판매를 책임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몇 명의 화상과 협력관계를 갖기도 했다. 1933년까지 국제무대를 상대로 클레 작품의 판매를 주로 담당했던 화상은 베를린과 뒤셀도르프에 갤러리를 가지고 있었던 알프레드 플레히트하임(Alfred Flechtheim)이었다. 1925년 7월, 클레와 골츠의 계약이 해지되기도 전에, 브라운슈바이그(Braunschweig)의 화상이자 콜렉터였던 오토 랄프스(Otto Ralfs)는 클레-게젤샤프트(클레협회)를 창설하게 되는데, 이로써 1930년대 말까지 클레는 작품의 판매로 부가적인 월수입을 보장받게 되었다.

1925년 봄, 파울 클레의 첫 학기 강좌를 요약한 『강의록』이 바우하우스 출판물 중 두 번째로 간행되었다. 파리의 바뱅-라스파이으(Vavin Raspail) 갤러리에서는 프랑스에서의 클레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11월,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파리의 갤러리 피에르(Galerie Pierre)에서 있었던 자신들의 첫 그룹전에 클레의 작품 2점을 포함시켰다. 초현실주의 작가들, 특히 르네 크르벨(Rene Crevel), 폴 엘뤼아르(Paul Eluard), 루이 아라공(Louis Aragon)과 막스 에른스트(Max Ernst)는 여러 해 동안 클레의 작품을 존경해 온 사람들이었다. 가르치는 일과 더불어 클레는 작품제작도 조직적으로 병행해 나갔다. 반년마다 오는 휴가기에 그는 이탈리아, 포르쿼롤르, 코르시카, 브르타뉴(1928)와 바스크 지방(1929)으로 여행을 다녔다. 1928년 12월과 1929년 1월 사이에는 클레협회의 재정적 도움으로 이집트 여행도 다녀왔다.

1929년 하반기에 베를린의 알프레드 플레히트하임 갤러리와 드레스덴의 노이에 쿤스트 피데스 갤러리에서는 클레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회고전이 열렸다. 파리에서는 크리스티앙 제르보(Christian Zervos)가 『카이에 다르(Cahiers d’art)』의 빌 그로만(Will Grohman)이 쓴 서문이 포함된 클레의 단행본을 출간한다. 1930년에는 르네 크르벨이 불어로 된 또다른 클레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1928년에는 바우하우스에서 발행하는 정기간행물에 「예술영역에 있어서의 정확한 실험들(Exact Experiments in the Realm of Art)」이라는 제목의 클레의 원고가 실렸다. 한편 새 교장으로 취임한 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의 책임 하에 바우하우스는 구성적·실용적 교과과정의 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이러한 추세가 클레의 작품에 반영되기도 하지만, 그의 활동은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바우하우스를 둘러싼, 심지어 바우하우스 내부의 정치적 논쟁에 직면하여 클레는 1928년 학교를 사퇴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데사우에서 가르치는 일은 점점 더 의무적인 학교출석과 같아졌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그는 학교를 그만둘 결심을 굳히지 못했다. 1929년 클레는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와 접촉을 하게 된다. 같은 시기에 그는 본국과 해외에서 여러 중요한 전시를 갖게 된다. 1930년에는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 베를린과 뒤셀도르프의 플레히트하임 갤러리에서 전시를 가졌고, 베를린 국립미술관에서는 오토 랄프스의 소장품전이 개최되었다. 이어서 1931년에는 하노버의 케스트너 협회와 뒤셀도르프의 미술협회, 베를린의 플레히트하임 갤러리에서 전시를 가진다. 이 시기는 클레가 해외에서 명성을 얻은 가장 뛰어난 독일 미술가로 손꼽히던 시기로, 그의 성공의 절정기로 볼 수 있다. 1931년 4월 1일, 클레는 바우하우스와의 계약을 종료하고,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받아들인다. 그의 임용은 기사화되어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뒤셀도르프 관립 미술아카데미에서의 교수직 1931-1933
1931년 10월 클레는 뒤셀도르프에서 회화기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학생이 4명에 불과했다. 그는 뒤셀도르프에 방을 얻었지만, 1933년 3월까지 데사우의 아파트도 계속 가지고 있었다. 클레는 두 도시에 모두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으면서 각 도시에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작업을 시도했다. 뒤셀도르프에서는 점묘화법을 이용해 캔버스에 색을 입히는 회화작업에 집중한다.

클레가 뒤셀도르프 대학교수로 재임하기 이전부터 독일에는 나치 독재로 향하는 경제적, 정치적 암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1929년 뉴욕 증권거래시장에서는 주가가 폭락하여 세계 경제에 심각한 위기상황을 몰고왔고, 이는 결국 정치적 위기와도 맞물려 1930년대 초반 클레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32년에는 경제위기와 집단실업이 극에 달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제국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나치 당국은 현대미술 작품의 거래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고, 많은 예술가들과 화상들이 타국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3월, 나치는 데사우 있는 클레의 아파트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클레는 잠시 스위스에 은신하게 되었다. 데사우에서 뒤셀도르프로 완전히 이사오기도 전인 4월 21일, 클레는 항소할 권리도 주어지지 않은 채 교수직을 일시정지 당했다가, 그 뒤 가을 학기를 끝으로 완전히 해임된다. 경제적, 정치적 상황의 악화로 클레는 미술시장 안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으려 한다. 그는 칸바일러(Daniel Kahnweiler)와 계약을 맺게 되는데, 이는 1910년 클레의 작품을 구입했던 첫 소장가 중 한 명인 베른의 콜렉터 헤르만 룹프(Hermann Rupf)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독일로 돌아와서 클레는 처음에는 새로운 정권의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1933년 12월 23일에 부인의 설득으로 스위스로 이주하게 된다. 정치적 격변과 자신의 생존에 대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1933년은 그의 작품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다. 클레는 작품목록집에 이 한 해 동안 총 482점의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그 중 314점은 드로잉 작품이었다.

히틀러가 정권에 오른 후, 국가사회주의당원(나치)들은 현대미술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클레는 ‘퇴폐 미술전(Degenerate Art, Entartete Kunst)’을 주도한 사람들에 의해 언론에 가장 빈번하게 공격당했던 화가 중 하나였다. 클레는 이렇게 ‘퇴폐 미술’ 작품의 목록을 만들고 미술가들의 작품을 몰수하는 나치의 정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여러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1933년 클레의 작품들은 나치가 구성한 <수치스러운 작품전(Shame shows)>에 선정되어 만하임, 쉠니츠, 그리고 드레스덴에 전시되었다.
나치가 권력을 쥐다. 이민 1934-1936
이민이나 도피와 다름없었던 클레의 베른으로의 귀향은 그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던 한 작가는 이제 너무나 갑작스럽게 아무런 문화적 자극이 없는 시골마을에서 지적으로 격리된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소수 그룹의 미술품 감정가, 콜렉터, 그리고 친구들만 연락하고 지냈다. 이민과 베른 체류 시기의 임시적인 거주환경으로 야기된 몇 달 간의 휴식기를 거쳐, 봄이 되면서부터 그의 작품활동은 다시 왕성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창작에 대한 위기의 조짐은 1934년에서 1936년 사이 심각해졌고, 결과적으로 작품 제작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1934년 봄, 런던으로 망명해 있던 화상 알프레드 플레히트하임의 주선으로, 영국에서 클레의 첫 전시가 런던 메이저 갤러리(Major Gallery)에서 개최되었다. 같은 해 6월, 칸바일러는 파리의 시몽 갤러리(Simon Gallery)에서 자신이 기획한 클레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해 가을에는 빌 그로만이 편집한 클레의 작품 카탈로그집 『파울 클레, 핸드 드로잉 1921-1930』이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나 1935년 나치가 이 책을 몰수한 후, 클레와 관련된 책의 출판은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타격을 입기 전, 베른 미술관(Kunsthalle Bern)에서는 1935년 2월부터 3월에 걸쳐 1919년부터 1934년까지의 클레의 작품을 총망라하는 큰 회고전이 열렸고, 이 전시는 약간 변형된 형태로 1935년 가을 바젤 미술관(Kunsthalle Basel)에서도 전시되었다. 이 전시에 대해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언론의 반응은 긍정적이기는 했으나 소극적이었고, 두 도시 모두에서 작품 판매는 역시 저조한 편이었다. 게다가 미술시장에 불어닥친 경제적 위기의 영향은 다른 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1937년 말까지 클레는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거의 작품을 팔지 못했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1936년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지난 세기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반추하는 두 개의 아주 중요한 회고전인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전>, <환상미술, 다다, 초현실주의 미술전>에는 클레의 작품 다수가 포함되었다.

1935년 가을, 클레는 심각한 병을 앓게 되었다. 후에 진행성 피부경화증으로 진단받은 이 병으로 클레는 1936년 봄까지 작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1936년 클레는 치료 차 스위스 알프스를 두 차례 방문하는데, 두 번의 긴 치료기간을 가진 후 병의 진행은 많이 완화되었으나 건강상태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그의 작품제작은 최저치를 기록하여, 한 해 동안 25점 제작에 그쳤다.
말기 작품 1937-1940
1937년, 클레의 건강상태가 많이 안정되었다. 2월 말부터 그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그의 마지막 시기의 가장 열성적인 작품활동의 시작이었다. 몸의 상태는 좋지 못했지만, 그의 작품 제작수는 다시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여, 1937년에는 264점, 1938년에는 489점, 1939년에는 1253점, 1940년에는 사망하기 전까지 366점의 작품을 남기게 된다. 그의 간결하고 명쾌한 드로잉 양식은 그가 죽은 뒤 오래도록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게 된다.

1937년 7월, 나치가 구성한 <퇴폐 미술전(Degenerate Art, Entartete Kunst)>이라는 명칭의 순회전이 뮌헨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에는 모욕적인 설명이 덧붙여진 15점 가량의 클레의 작품이 포함되었다. 다른 독설적인 표현도 많았지만, 그의 작품은 ‘정신병자의 그림’으로 묘사되었다. 이와 더불어 1937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나치의 몰수정책의 일환으로 여러 독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총 102점의 클레의 작품이 철거되었고 이중 대부분의 작품은 이후에 외국으로 팔려나간다. 또한 독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1933년 이전의 클레의 주요 작품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외국 콜렉션, 특히 미국으로 많이 유출되었다. 클레는 이러한 나쁜 소식들을 멀리하고, 더욱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1937년 9월에서 10월에 걸쳐 클레와 그의 아내 릴리는 아스코나(Ascona)에 머무는데, 이곳에서도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 작품활동에 집중한다. 이곳에서 클레 부부는 루이 무와이에와 마리안느 폰 베레프킨(Marianne von Werefkin)을 포함한 많은 친구를 만났다. 이후의 몇 년간 클레는 종종 오랜 기간 동안 치료를 받기 위해 집을 떠나있곤 한다. 병으로 인해 베른에 살면서 상당히 고립되어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마지막 시기였던 이 때 그는 중요한 예술가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1937년 칸딘스키가 그를 마지막으로 방문했고, 같은 해 피카소도 한차례 그를 보러 들렀다. 1939년 클레는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와도 알고 지내게 된다.

1938년 봄, 칸바일러는 자신의 갤러리에 클레의 최근 작품들만을 가지고 전시를 개최하였다. 1938년 초, 화랑주인이었던 노이만(J.B. Neumann)과 독일을 떠나 망명 중이던 화상 칼 니렌도르프(Karl Nierendorf), 쿠르트 발렌틴(Curt Valentin)은 뉴욕과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정기적으로 클레의 전시를 개최하였고 미국에서 클레의 미술을 대중화하는데 성공했다.

1939년 9월 1일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스위스 군대가 동원되자, 클레 부부는 더욱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클레는 한층 작업에 몰두하는데, 1939년은 작품의 숫자로만 보면 그의 활동기 중 작품제작이 가장 활발했던 한 해였다. 이 시기 그는 대형 연작을 제작하였는데, 그 중 천사들의 모습이 그려진 연작에서는 그의 미묘한 표현적 가능성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1940년 2월, 취리히 미술관(Kunsthaus Zurich)에서는 클레의 60회 생일을 기념하는 대형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는 1935년부터 1940년까지의 클레의 작품을 다룬 전시로, 클레 자신의 생각대로 구상된 유일한 후기작품 전시회였다. 병세가 악화되어 클레는 전시가 끝나기 직전에야 겨우 자신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에 열린 마지막 전시였던 이 전시는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는데 예를 들면 그의 신체적 건강상태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상태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었다. 클레는 여전히 작업을 하고 있었고 자신의 시간이 다하여 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366점의 작품을 남긴 약진의 한 해였던 1940년은 그의 모토였던 ‘하루도 빠짐없이 선을 그린다’를 실현한 해였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클레가 사망하던 해에 완성한 작품 중 가장 감명깊은 작품은 무제의 <정물화>(죽음의 천사)로, 자신의 작품목록집에 등록할 시간마저 허용되지 않았던 작품이다.

클레는 1940년 6월 29일 로카르노-무랄토(Locarno-Muralto)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같은 해 베른의 미술관과 뉴욕의 쿠르트 발렌틴 갤러리에서는 클레의 추모전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