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와 현대미술
김영나 (서울대 교수)
I
파울 클레는 18세에서부터 40세까지 일기를 썼고, 자신의 작품들을 꼼꼼히 정리했을 뿐 아니라, 편지, 전시 평문, 그리고 몇 권의 이론서를 저술하는 등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는 자료를 상당히 많은 남긴 미술가이다. 그러면서도 “위대한 미술작품의 여러 가지 의미 중에는 이성적인 설명이 적용될 수 없는 마지막 비밀(final secret)이 있다”는 말로, 미술작품이 언어로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음을 시사했다. 그의 말은 누구보다도 클레 자신의 작품을 잘 설명하는 것 같다. 하나하나가 작은 보석 같은 그의 9,100 여점의 작품들은 몇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우리만큼 다양하고 다면적이어서 전체 작품세계가 쉽게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클레의 작품들은 대부분 소품들로서,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심원한 지성으로 본 인간과 세계, 그리고 자연과 우주적 근원에 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유명한 평론가 존 카나데이(John Canaday)는 클레야말로 현대미술을 다 이해한 다음에 연구하는 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울 클레(1879-1960)가 활동했던 시대, 다시 말하면 20세기 전반기는 현대미술의 격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바실리 칸딘스키, 피에트 몬드리앙, 마르셀 뒤샹 등 기라성 같은 미술가들이 활약하던 시기였다.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방향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된 시대적 경험이 있었다. 우선 당시 가장 큰 시대적 관심은 추상미술이었다. 많은 작가들은 자연의 재현에서 떠나 선, 색채, 형태로 구성되는 추상 미술의 세계를 추구했고, 일부는 보이는 세계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세계,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탐구하거나, 과학 기술, 기계와 도시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현대적 삶의 표현을 갈구하고 있었다. 또한 1차 세계대전의 살상과 1930년대 독일에서의 파시즘 정권 아래에서의 억압은 허무주의와 사회 비판적인 경향의 작품들을 양산하기도 했다. 클레는 현대미술의 주요 미술가들을 만나고 입체주의, 표현주의, 다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주요 흐름을 흡수하고 종합하였지만, 어떤 한 영역에 속하지 않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한 화가였다. 그는 사실주의적 작품들을 경멸했으나 그의 작품들은 완전히 추상적이지도 완전히 형상적이지도 않았다. 고도의 숙련된 드로잉과 색채의 상호관계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 환상과 유머, 그리고 재치는, 그를 20세기의 가장 독자적인 화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게 하는 특징들이다. 이 글에서는 클레가 어떻게 여러 미술운동 및 미술가들과 교류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II
클레의 집안은 음악가 집안이었다. 독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베른의 음악선생이었고, 스위스 태생의 어머니도 스튜트가르트의 음악학교를 나왔다. 클레는 어려서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한편 외할머니의 격려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일찍부터 선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클레는 주로 책의 삽화나 포스터 등을 모사하거나 주변의 풍경 드로잉들을 그리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고민을 하던 그는, 결국 1900년 뮌헨 아카데미에 들어감으로써 미술로 방향을 정했다. 뮌헨에서 그는 당대의 유명한 상징주의 화가였던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에게 잠시 사사하게 된다. 이 무렵 클레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삽화나 풍자화였다. 그는 미술학교에 다니면서도 화가가 되기보다는 신랄한 풍자화를 그릴 수 있는 삽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좋아했던 것은 독일의 문예 잡지였던 짐플리시무스(Simplicissimus)와 유겐트(Jugend)에 실린 삽화들이었고, 교과서의 여백이나 스케치 북에 그로테스크하게 왜곡된 인체나 동물들을 표현한 풍자화들을 그리기도 하였다. 미술학교를 나온 후에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기도 하고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는데, 그가 좋아했던 작가들은 괴테, 볼테르,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E.T.A.호프만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독일의 지성적이고 철학적인 문화의 분위기를 사랑했다.

1906년 피아니스트였던 릴리 슈툼프 (Lily Stumpf)와 결혼한 후 그는 뮌헨에 정착하게 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주로 연필, 펜, 에칭, 유리 위에 유채 등, 여러 매체를 실험한 것들이다. 그는 여전히 낙서 같은 풍자화를 그리거나 가늘고 신경질적인 선을 구사한 드로잉 등을 즐겨 그렸다. 반 고흐, 세잔느, 마티스, 등의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지만, 그에게 색채 구사는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졌다.

클레의 중요한 예술적 성장은 뮌헨에서 청기사 그룹과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1911년에 바실리 칸딘스키를 만났고 청기사파(Der Blaue Reiter)에 합류했다. 청기사파는 바실리 칸딘스키, 아우구스트 마케, 프란츠 마르크,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등 당시 뮌헨에 있었던 미술가들의 모임이었다. 칸딘스키와 마르크가 좋아했던 청색과 마르크가 좋아한 모티프였던 말 탄 기사를 합친 이름이 시사하듯이, 청기사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적 미술가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사실의 재현에서 벗어나 미술가의 미적 감정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회화형태로 실현하려고 했고, 그 결실의 하나가 1913년 경 칸딘스키가 시도했던 순수한 색채, 형태, 선으로 된 비대상 미술의 탄생이었다.

청기사파의 주요 활동 매체는 청기사 그룹의 간행물이었던 Blaue Reiter Almanch의 발간이었다. 칸딘스키와 마르크가 주도한 이 간행물은 미술뿐 아니라 문학, 음악을 아우르는 종합예술지로, 여기에는 아동미술, 말레이시아 목각인형, 멕시코 조각, 중세 조각, 원시 미술 등에 대한 다양한 문화와 예술에 대한 글들이 포함되었고, 특히 음악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등의 악보도 실렸다. 그것은 클레뿐 아니라 칸딘스키도 음악과 미술의 유사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기사 그룹의 화가들과 활동하면서 클레의 작품들도 1913년경부터는 추상성이 강해지기 시작한다.

청기사파는 다른 나라의 화가들과도 교류했지만, 특히 청기사파와 공감했던 미술가는 프랑스의 화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였다. 들로네는 1911년에 뮌헨을 방문하여 청기사파 1회전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1912년에는 칸딘스키, 클레를 비롯한 청기사파가 들로네를 찾아 파리를 방문하였다. 들로네의 미술에 깊은 감명을 받은 클레는 들로네의 글 <광선에 대해La Lumiere>를 청기사 간행물에 번역하여 싣기도 했다. 당시 들로네는 누구보다도 앞선 추상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광선은 모든 자연을 활기 있게 만든다고 믿었으며, 비물질적이고 움직이는 광선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려 하였다. 그의 <창>연작들에서 색채는 병렬과 대조를 통해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고립되지 않게 연속되거나 대조를 이룸으로써 광선의 감각과 움직임 공간의 깊이와 리듬을 표현한다.

들로네의 색채 프리즘 같은 추상작품과 함께 클레에게 색채 표현의 큰 전환점을 마련해준 것은 1914년에 있었던 튀니지 방문이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강렬한 태양 속에서 갑자기 색채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쫓아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색채의 감을 잡았다. 이제 색채는 나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색채와 나는 하나이고 나는 화가다.” 이후 제작한 많은 수채화 작품에서 형태나 대상은 광선의 시각적 리듬 속에서 파랑, 초록, 빨강, 노랑, 주홍의 투명하고 밝은 색채로 나타난다. 색채의 발견에 희열을 느꼈던 열정적인 이 시기에 그는 세계 제 1차 대전을 맞이하였다. 전쟁이 클레에게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으나, 청기사파의 일원이었던 아우구스트 마케와 프란츠 마르크가 전선에서 사망하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1916년에는 그 자신도 군에 입대해야 했으나, 비행학교에서 사무직을 담당하였으면서 클레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클레는 1916년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한 다다운동의 주요 작가들과 교류했고, 한스 아르프, 막스 에른스트와도 만났으며, 베를린의 데어 슈투룸(Der Sturm)에서 기획한 다다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9년경부터 시도한 유화 전사(oil transfer)기법은 다다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화전사 기법이란 드로잉을 한 종이를 유화물감을 바른 종이위에 놓고 꾹꾹 눌러 그 밑에 있는 또 다른 종이에 전사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하여 선이 마치 인쇄된 것 같은 효과를 가지게 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전사된 드로잉의 배경에는 수채 물감이 더해졌다. 이러한 기법으로 한 작품인 1922년의 <지저귀는 새>는 다다적 기발함과 풍자가 있다. 철사로 서투르게 만들어진 새의 머리는 아래에 연결된 대를 돌리면 지저귀게 되어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인 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계의 조합은 새들이 지저귀더라도 살아있는 새보다 더 잘 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킴으로써 기계 장치를 무용물로 만들고, 이를 통해 기계시대에 대한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을 조롱한다.
III
1921년, 클레는 독일의 바이마르에 설립된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수로 채용되었다. 바우하우스는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을 통합시키고자 했던 조형예술학교였다. 교장인 발터 그로피우스는 과학 기술과 수공예를 연결시켜 아름답고 유용한 디자인을 개발하여 인류의 생활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우하우스 교육의 신선함은, 여전히 인체위주의 드로잉과 석고묘사를 주로 하는 미술 아카데미의 교과과정에서 벗어난 점 이외에도 이제까지 회화, 조각에 밀려 있던 공예와 디자인을 미술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근대적 미술교육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 데에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입학하면 기초조형반과 공방의 두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기초 조형반에서는 클레와 칸딘스키, 요셉 알버스, 오스카 슐레머, 요하네스 잇텐과 같은 순수미술가들이 형태나 색채, 또는 재료 표현 등 미술 전반에 걸친 이론 교육을 담당했으며, 이들은 조형 마이스터로 불렸다. 이 과정을 마치면 공방에 들어가 텍스타일이나 가구 디자인 등 전공 분야의 기술, 제작 방법 등을 공부하게 되는데, 공방 교육을 담당한 교수들은 공방 마이스터로 불렸다. 클레는 도서 제본, 유리 그림, 구성, 그리고 기초 디자인을 가르쳤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일과에 대해서는 필요한 만큼만 간여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작업에 열중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의 클레는 곧 ‘바우하우스 부처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지만, 거의 3,300 쪽에 달하는 강의 노트는 클레가 얼마나 탄탄한 미학적 이론과 지성을 갖추고 열정적으로 강의에 임했는지를 보여준다.

바우하우스에서 처음으로 넓은 스튜디오를 가지게 된 클레는 이곳에서 약 10년간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가장 창조적인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이 기간에 제작한 그의 작품들은 주제나 기법 등에서 아주 다양하여 일정한 패턴이나 단선적인 발전 과정으로는 정리가 되지 않는다. 때문에 1954년에 클레의 단행본을 낸 미술사학자이자 클레의 친구였던 빌 그로만(Wil Grohman)은 클레의 작품들을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동심원으로 구분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가장 밖에 있는 영역(outer circle)에는 삶과 자연의 어떤 순간들이나 사건에서 시작한 작품들이, 중간 영역(middle circle)에는 지나치게 상징적이지 않으면서 형태와 의미가 회화적 요소의 질감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작품들이,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영역(inner circle)에는 클레자신의 세계관이 드러나는 매우 상징적인 작품들이 놓인다. 그로만의 이러한 분류는 형상이 있는 작품보다는 추상작품들을 더 높이 평가했던 그의 개인적인 취향도 작용했을 것이다.

바우하우스에서 있었던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무엇보다 기법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다양한 재료와 구성을 실험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캔버스뿐 아니라 삼베, 천, 거즈, 나무판 등을 사용했고 유화뿐 아니라 템페라, 수채, 과슈, 동판 , 드로잉 등을 실험했다. 또 작품 양식에서는 기하학적 형태와 구조에 대한 관심이 강해졌는데 이것은 논리와 이성에 바탕을 둔 바우하우스의 전반적인 양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바우하우스의 구조적 양식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은 192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마술적인 사각형‘(Magic Square)연작이다. 클레는 시각적 재현에서 벗어나 검은 바탕에 사각형의 색채가 하나하나의 음과 같이 자리 잡은 격자 구성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각형이나 기하학적 추상의 시도는 이 무렵 러시아의 카지미르 말레비치나 네덜란드의 피에트 몬드리안의 작품과도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말레비치나 몬드리안의 작품이 정확한 기하학적 형태와 형태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화면의 구조적 균형과 긴장감을 핵심으로 하는 데 비해, 클레의 작품은 사각 형태의 연속에서 느껴지는 시적이면서 음악적인 운율감의 서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클레의 작품들은 마치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은 빛과 에너지, 감정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이성주의보다는 낭만주의, 또는 표현주의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시도하고 강의했던 것은 음악의 대위법 (Polyphony)과 같은 다성적(多聲的) 회화였다. 대위법은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들의 음악에서 흔히 발견되는 기법으로, 여러 개의 선율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적으로 결합되는 구성을 의미한다. 클레가 1920년대 후반부터 시도한, 투명한 색채의 면들을 여러 겹 겹쳐 새로운 색채를 만들어 내거나 회화적 깊이와 색채의 상호작용을 조정한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음악적 대위법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기호와 상징, 달과 같은 둥근 얼굴의 인간 형상들, 그리고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문지르거나 긁거나 하는 기법들도 이 시기에 나타난다.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처럼 진지하고 심각한 미술에 어린아이 같은 환상적이면서 순수한 시각을 결합시켰다. 그에게 풍부한 이미지의 보고(寶庫)는 바로 자연이었다. 시간이 나면 바다나 산, 들을 찾았던 클레는 조개껍질, 식물, 꽃, 나무 등을 관찰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들에 붙인 시적이면서도 함축적인 제목들은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시간과 장소의 분위기를 전달하면서도 그 장소와 연관된 사물이나 사건들에서 걸러져 온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의 제목들은 회화작품과 또 다른 차원에서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는 당시 사진가들이 촬영하던 식물들의 사진, 플랑크톤과 같은 바다의 미생물들, 씨앗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식물학, 생물학, 해부학, 인류학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과 지식으로 그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자유자재로 창조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이미지들과 주제들은 유머와 재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겪었던 전쟁의 재난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악몽, 그리고 어리석고 약한 인간을 은유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1924년에 프랑스의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제창된 초현실주의 운동과의 연관성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깊은 원근법들을 겹겹이 사용한 작품들은 이탈리아의 화가 죠르지오 데 키리코(Giogio de Chirico)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글자 또는 칼리그램은 이전부터 클레의 작품에 등장하는 중요한 요소였지만,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상형문자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Automatic drawing)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나타났다. 클레와 초현실주의자들이 공감한 것은 꿈에 대한 관심, 그리고 신화나 문화적 상징에 대한 관심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유럽에는 점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1928년 발터 그로피우스가 교장을 그만두면서 바우하우스의 운영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클레는 1931년에 뒤셀도르프 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겼으나 나치의 탄압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치는 클레를 퇴폐적인 미술가로 낙인찍고 그의 작품들을 반독일적 작품으로 전시하였으며 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작품들을 몰수하였다.
IV
1933년에 클레는 스위스 베른으로 피신하였다. 독일 미술계와 연락이 끊어지자 그는 이 작은 도시에서 거의 고립된 상태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4-35년 사이에는 거의 작품을 제작하지 못했으며, 1935년에는 희귀한 피부경색증(scleroderma)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자가면역체계가 붕괴되면서 피부가 딱딱해지고 조금씩 죽어가는 이 병은 치유불가능한 병이었다. 그는 이제 매일 아침에 한 시간씩 연습하던 바이올린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고, 음식물도 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병이 악화되자 거의 죽만 먹었으며, 작품도 의자에 앉아서밖에 제작할 수가 없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는 1937년에는 264점을, 1938년에는 489점을, 그리고 1939년에는 1253점을 제작하는 무서운 집중력을 보였다.

만년에 나타난 양식적 특징은 검고 굵은 선의 사용이다. 굵은 선의 사용이 어쩌면 병으로 인해 가늘고 섬세한 선의 구사가 어려웠기 때문일 수 있다는 시각도 있지만, 이 굵은 선들의 작품들은 오히려 일반인들에게는 클레의 가장 중요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각인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가 애매하거나 각이 진 형상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형상을 단순한 선과 넓은 면으로 그리는 방법에서는 스페인의 후안 미로를, 그리고 각이 지거나 인체의 부분들이 흩어지고 불편한 형태의 등장에서는 1930년대의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들과의 연관성을 연상할 수도 있다. 특히 피카소는 1937년에 베른으로 클레를 방문한 바 있고 그를 “파스칼-나폴레옹”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나폴레옹과 같은 작은 체구에 파스칼과 같은 지성을 갖춘 화가라는 의미에서였다.

만년에 등장하는 또 다른 특징은 유머나 재치보다는 인간에 대한 슬픔이나 비관주의가 느껴지고 죽음에 대한 내용이 많아졌다는 점, 그리고 작품들의 규모가 커졌다는 점이다. 1939년에 제작한, 천사를 주제로 한 29점의 회화와 드로잉 작품들, 그리고 1940년 작품인 <죽음과 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V
파울 클레는 20세기 미술에서 가장 지적이면서 다양한 작품세계를 이룩한 화가였다. 그는 고도로 숙련된 선과 세련된 색채로 풍자, 재치와 유머, 그리고 철학이 있는 미술세계를 이루어냈다. 그는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자였고 세계를 순수하게 보고자 했으나, 그가 살았던 시대의 눈부신 과학기술 발전, 현대화와 더불어 겪었던 전쟁의 광기 속에서 이상론자와 회의론자의 양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역사적 의식이 강한 화가였으나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관찰하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성장과 파괴, 생성과 변화를 회화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에게 자연과 인간세계는 창조와 생성, 그리고 죽음의 순환이라는 이미지를 제공했다. 파울 클레는 자신이 보고, 읽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원초적인 상징과 형태를 창조해내면서 20세기의 화가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이미지 창조자의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